이 말은 중국 명나라 말기 사람인 홍응명(자성)의 통속적인 처세술을 담은 채근담(菜根譚)에서 찾아볼 수 있다. ‘地之穢者 多生物, 水之淸者 常無魚, 故君者 當存含坵 納汚之量 不可持好 潔獨行之操( 지지예자 다생물, 수지청자 상무어, 고군자, 당존함구 납오지량 불가지호 결독행지조) 해석하면 이렇다. ’더러운 땅에는 초목이 무성하고, 물이 맑으면 고기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군자는 때 묻고 더러운 것이더라도 받아들이는 아량을 가져야 하고, 깨끗한 것만 즐기며, 혼자서만 행하려는 절조를 갖지 말라‘. 얼핏 듣고 얼핏 생각하면 이 말은 허점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이 말을 가장 좋아하고 선호하는 사람은 정치인이다. 사람이 너무 맑고 깨끗하면 사람이 꼬이지 않고 편협한 사람이니 정치인의 그릇이 되지 못하는 고로 그런 사람은 멀리해야 되고, 부정부패도 포용적으로 담아내야 큰 정치를 하는 것처럼 국민들을 속이고 있다. 마치 그것이 화합이고 통합인 냥 떠들어 댄다. 대부분 사회지도층 및 정치인들은 이 말을 자기합리화로 무장하여 마치 군자의 도를 걷는 것으로 착각을 한다. 많은 국민들도 이러한 말에 현혹되어 맞장구를 친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는다’ 라는 말은 말짱 허구이고 거짓말이다. 약삭빠르고 통속적인 처세술이 마치 군자의 도리인 냥, 거짓으로 위장한 소인 잡배들의 교활한 작태일 뿐이다. 사회가 혼란스럽고, 민심이 흉흉해지면 이 말의 전파력은 더 위협적이다. 혼란한 시기에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을 분열세력으로 몰고 화합과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넓게 포용할 수 있는 세력이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 이런 우민화 정책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말은 주로 통치자나 그 주변세력들이 백성들을 우민화시키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로 인하여 백성들은 자기도 모르게 시야가 좁아졌고, 판단능력이 흐려졌다. 통치자 및 권부들은 통치수단으로 이 말을 차용해 파당과 붕당을 획책하고, 지역감정을 조장하여, 지지기반을 구축하는데 십분 활용했다. 이 좁은 시야의 패거리 문화는 사회전반에 깊고 넓게 퍼져있다. 신성해야 할 대학에서 조차 신규교수를 채용하려면 패거리 문화로 인하여 상식적인 임용이 거의 불가능 할 지경이라 한다.
사실, 맑은 물에 고기가 더 많이 살고, 더 큰 고기가 생존한다. 맑은 물이 아니면 다양한 고기가 생존하지 못하고 큰 고기가 자라지도 못한다. 동양적 사고방식은 ‘물’이라는 범위를 너무 왜곡하고 축소시켰다. 왜냐하면, 통속적인 처세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해서는 뭔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물’을 인용했고, ‘물‘을 민물에만 국한시켰다. 민물의 생성과정을 살펴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발원지를 기점으로 작은 물줄기가 생성된다. 이 물줄기는 맑고 깨끗하고 좁다. 그러니 작은 물고기가 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거다. 먹이사슬도 적으니 적은 물고기가 사는 것이고, 그 작은 물들이 모여 큰 강이 되면 온갖 것들이 모여들고 그에 따른 다양한 물고기들이 서식하는 거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는다는 말로 진화한 것은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의 이기심 때문이다.
사람이 너무 맑고 깨끗하면 주변에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처럼 둔갑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모순이다. 깨끗하고, 맑아서 모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여드는 사람이 더럽기 때문이다. 자기 허물을 전가시키려는 습성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사람과의 만남을 원한다. 향기로운 사람과 교류를 원한다. 그런데 내가 향기롭지 못한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향기로운 사람을 비난한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심종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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