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사건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기소 단계부터 다룬다. 검찰의 공소사실에 따르면 2010년 3월 31일 당시 조현오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서울 종로구 내자동 서울경찰청 대강당에서, 서울경찰청 소속 5개 기동단 팀장급 398명을 상대로 특별교양을 실시했다.
이날 조현오 청장은 “작년 노통, 노무현 전 대통령 5월 23일 부엉이 바위 사건. 노무현 전 대통령 뭐 때문에 사망했습니까? (부엉이 바위서) 뛰어내린 바로 전날 10만원 짜리 수표가 입금된 거액의 차명계좌가 발견됐다. 아무리 변명해도 변명이 안 되니까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린 겁니다”라는 등의 발언을 했다.
이런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족과 노무현재단 등이 강하게 반발하며 현직 조현오 경찰청장을 고소ㆍ고발했다.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해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사자(死者) 명예훼손 혐의와 유족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다.
현직 경찰청장 신분이어서 검찰의 조사가 빨리 이루어지지 않자, 당시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등 노무현재단 소속 인사들과 시민들이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에서 검찰 수사를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결국 불구속 기소된 조현오 전 경찰청장은 법정에서 “강의를 하기 며칠 전 당시 대검 중수부의 수사 상황을 알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들었다”,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서 당시 믿을 만한 사람으로부터 들은 내용을 사실로 믿었다”고만 거듭 말할 뿐 그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았다.
이에 즉각 항소하며 보석을 신청한 조 전 청장은 보석 심문에서 “강연 발언 출처 3명을 증인으로 신청하겠다”고 해 구속된 지 8일 만에 석방됐다.
23일 서울중앙지법 제1형사부(전주혜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항소심 첫 공판준비기일에서 조현오 전 경찰청장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차명계좌에 관한 얘기를 한 유력인사는 임경묵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이사장”이라며 “2010년 3월 31일 강연에서 말한 내용은 그로부터 불과 며칠 전에 임 전 이사장으로부터 전해들은 것”이라고 진술했다.
이에 재판부는 즉각 임경묵 전 이사장을 증인으로 채택했다. 만약 임 전 이사장이 증인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재판부는 직권으로 구인 절차를 밟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임 전 이사장은 조현오 전 청장을 명예훼손으로 법적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조 전 청장은 이날 재판에서 대검 중수부의 수사상황을 잘 알 수 있는 나머지 2명의 실명은 공개하지 않았다.
▲ 민주당 법률위원장인 판사 출신 박범계 의원 이와 관련, 노무현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법무비서관을 지낸 박범계 의원은 이날 보도자료를 내고 “임경묵 전 이사장은 2007년 한나라당 경선과 대선과정에서 이명박 후보 당선에 크게 기여한 공으로 MB정권 출범 직후 국정원 싱크탱크인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이사장에 취임해 지난달 사퇴할 때까지 MB집권 5년간 막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졌고, MB와 독대할 수 있는 몇몇 핵심 실세 중 하나로 전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박 의원은 “특히 임 전 이사장은 과거 안기부(국정원) 102실장 출신으로 1997년 김대중-이회창 후보가 격돌했던 대선 때 이회창 후보를 돕기 위해 권영해 안기부장 주도 하에 자행됐던 ‘북풍’, 세풍 사건과 같은 공작정치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라며 “국정원의 선거개입이 불거진 이 시점에 또다시 ‘고 노무현 대통령 차명계좌 관련 발언’의 발원지가 국정원 관계자라는 점에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분강개했다.
그는 “조현오 전 청장은 자신의 형사책임을 면하기 위해 임 전 이사장의 말을 믿을만한 것처럼 진술했는데, 임 전 이사장은 수사라인이 아니며 정보기관의 자문기관장에 지나지 않는다”며 “정치공작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장면”이라고 강한 의혹을 제기했다.
판사 출신인 박 의원은 “조 전 청장은 이런 측면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후 대검 중수부 최고책임자로부터 확인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아주 영리한 대응”이라며 “한편으로 자신의 차명계좌 발언의 직접적 근거로 대검 중수부 관계자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을 피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정보기관 종사자의 아니면 말고 식의 공작 전언에 근거를 보강키 위해 대검 중수부 관계자를 걸쳐놓는 수법”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또 “대검 중수부 최고책임자가 발언의 직접적 근거가 되면 중수부 최고책임자들은 수사기밀 누설의 형사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라며 “그래서 당시 최고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이인규 전 중수부장, 홍만표 전 수사기획관을 증인신청조차도 하지 않았다”고 간파했다.
박 의원은 “결론적으로 조 전 청장의 이번 진술이 조금이라도 진실성이 있다면, 그것은 대한민국의 중추적인 수사기관인 대검 중수부와 국정원, 경찰의 삼각동맹이 고 노무현 대통령을 부관참시한 것이고, 진실성이 없다면 조 전 청장은 자신의 형사책임을 면하기 위해 정보당국 관계자와 검찰관계자를 교묘히 끌어들인 것”이라고 꼬집었다.
박 의원은 그러면서 “법원은 어떠한 성역도 없이 조 전 청장의 차명계좌 발언과 관련한 진실규명에 박차를 가해주길 기대한다”며 “조 전 청장의 발언이 사실이 아닐 경우, 조 전 청장을 법정구속한 1심 재판에 버금가는 엄벌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