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나꼼수와 종편, 2012년 대선과 박근혜 시대를 열다 (3)
박근혜 정부가 출범할 때 권력기반은 탄탄해 보였다. 미디어 환경은 종편으로 인해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기울어져 있었다. 과반지지로 당선됐다는 정당성도 있었다. 박근혜는 유권자 중 30~35%의 시민들에게 대한민국의 성공한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가리키는 기호였다. 지지층에게 ‘박근혜’는 ‘박정희와 육영수의 딸로, (그 부모들처럼) 국가에 대한 지극히 높은 수준의 공적 헌신성을 가진 존재’였다.
이 기본인식이 공유되었기 때문에 어지간한 실책이나 무능이 용서됐고, 야당이나 주변 각료의 책임이라며 떠넘기기를 하는 것이 먹혔다.
언론의 협조도 절대적이었다. 《조선일보》가 또 한 번 두드러졌다. 2013년 채동욱 검찰총장 지휘하의 검찰이 국정원 대선 개입 댓글 수사를 예사롭지 않게 하자,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자식’ 보도로 잠재웠다. 무려 검찰총장 찍어내기에 주력으로 동참했다. 훗날엔 청와대 측 인사들로부터 정보가 전달된 게 아니냐는 의혹도 나왔다.
보수파의 엘리트들이 모두 협력하여 만든 정부, 국정원과 검찰 등 사정기관들을 꽉 틀어쥔 정부, 적어도 30%의 유권자들이 굳건한 신뢰를 보내는 정부였다. 박근혜 정부 시기 사회운동가들은 하다 못해 이명박 정부 때도 그냥 넘어가던 ‘대통령 물러가라’는 구호에 지나가던 노년층이 삿대질을 하며 욕설을 하는 광경을 보며 당혹해했다. 한국 사회의 보수정부로서 이보다 반석 같은 조건 위에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최순실 일가의 사익추구에 골몰하지 않았다면 허물어질 수가 없는 정부였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탄생한 정부가 보수파의 엘리트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통치를 한다. 처음에는 권위적이라거나 의전을 중시한다거나 보안 유출에 민감한 정부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런 정권 운용 방식이 단지 ‘패밀리 비즈니스’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 더구나 그 ‘패밀리’가 흔히 한국인들이 예상하던 동생 박근령이나 박지만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훗날 드러난 바에 의하면, 박근혜와 최순실, 그리고 ‘문고리 3인방’은 공적 절차를 전혀 밟지 않고 일개 가정의 의사결정 구조 비슷한 결정 구조로 나라를 통치했다. 최순실은 일방적으로 지시를 내리는 가부장에 비유할 수 있었고, 박근혜는 그 지시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처에 비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가부장 구도와는 달랐다. 밖으로 드러난 것은 박근혜였고, 결정권자라고 알려진 것도 박근혜였다. 최순실은 대외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철저하게 숨겨졌다. 정치권과 유권자 층에서 권력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은 박근혜라는 상징이었기 때문이고, 그녀를 좌지우지하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이 발각되어선 안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문고리 3인방’은 숨겨진 최순실이 박근혜에게 명령을 내리고 박근혜가 그 명령을 자신의 권력을 통해 실행하는 것을 철저하게 돕는 도구적인 역할을 했다. 흔히 말하는 심복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최순실과 박근혜 사이, 그리고 그들과 외부세계를 연결하는 수족이었다. ‘3인방’ 중에서도 연설문을 담당하는 핵심이었다는 정호성은 2017년 1월 19일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증언에서 “최순실은 저희 입장에서 대외적으로 없는 사람”, “안타깝게도 이 상황까지 오게 된 게 이 사람이 밖으로 등장하면서 일이 꼬인 것 같다”라고 말하다가 국회 측 이용구 변호사로부터 “지금 말한 바로 그게 ‘비선실세’라는 의미”라는 반박을 듣고 답을 하지 못했다(김소희 기자, <법원 정호성“ 최순실, 아무도 모르게 도와주는 사람” … 국회 측“ 그게 비선실세”>,《법률방송뉴스》, 2017년 1월 19일자).
이들이 청와대에서 행한 범죄행각은 오직 이러한 구도에서 바라볼 때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박근혜가 그 모든 행위를 공적인 것으로 이해했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최순실의 목적은 이윤추구였다. 그렇기에 권력을 나눌 수가 없었다. 청와대 참모진, 여당, 보수파 원로, 보수 언론의 조언 등을 무시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보수파 엘리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어느 정도 양보를 하면서 박근혜란 정치인이 일종의 ‘보수파 컨소시엄’인 것처럼 포장했을 수도 있다.
사실 만일 이것이 실행되었다면 대한민국에겐 더 위험했다. 이를테면 박근혜 정부가 국민연금을 통해 삼성에게 안겨다준 이익을, 최순실이란 특정 개인의 주머니를 착복하지도 않고 단지 ‘사심없이 삼성의 이익이 국가의 이익이란 신념만으로’ 했다면 어떻게 처벌할 수 있었을지를 생각해보자. 이렇게까지 문제가 될 수도 없었을 테고, 헌법재판소가 심판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보수파 컨소시엄’이 성립하지 않고 다만 그곳이 최순실이란 개인의 이익착복 기구가 된 것이 어쩌면 대한민국에겐 행운이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임기가 진행되면서 보수파 엘리트들도 박근혜 정부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됐다.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먼저 느꼈다. 박근혜 정부 시기 청와대에선 아무것도 취재가 되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진보 언론들에겐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이른바 조중동에게 특혜적으로 정보를 제공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에서는 보수 언론들조차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정부에서 발표한 현안에 대해서 질문해도,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조차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청와대 대변인이 청와대와 기자들의 가교가 아니라, 청와대에서 일어나는 비밀스러운 일을 은폐하고 기자들에게 둘러대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알려졌다시피 질의응답은 미리 순서와 내용이 짜였고, 추가적인 질문도 허용되지 않았다.
한국 언론의 기자들은 불평만 할 뿐이었지만, 외신의 반응은 빨랐다. 그들은 취재가 되지 않는 한국에 더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한국은 외신기자들의 ‘무덤’이 되어 갔다. 익명의 외신기자는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정부 관계자를 만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청와대를 통하거나 외신 대변인을 경유해도 도무지 확인되는 게 없다”며 취재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국내 언론의 청와대 기자단도 확인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당연한 결과다. 정부가 언론을 상대하지 않는 탓에 외신은 더 이상 한국에 있을 필요를 못 느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7월 서울에서 도쿄로 아시아총국을 이전했고 프랑스 르피가로는 서울특파원을 중국의 상하이로 이동시켰다. LA타임스는 서울특파원을 본사로 철수시켰다. 미국 경제뉴스 전문방송 CNBC, 프랑스 공영 RFI, 독일 대외무역 정보지 GTAI 등도 올해 서울지국을 철수하거나 특파원을 뺐다(정철운,《박근혜 무너지다》, 메디치, 2016, 49쪽).
이명박 정부와는 달리 박근혜 정부는 보수언론을 상대로도 걸핏하면 소송했다. 2013년엔 《국민일보》, 2014년엔 《시사저널》과 《세계일보》와 《동아일보》, 심지어는 외신인 일본 극우언론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가토 다쓰야를 향해 소송을 걸었다. 2016년엔 우병우 수석 처가 땅 매매 의혹을 보도한 《조선일보》 기자들을 고소했다(정철운,《박근혜 무너지다》, 메디치, 2016, 30~31쪽).
조중동으로 일컬어지는 보수 언론은 2014년 《세계일보》를 통해 촉발된 정윤회 문건 파동 때도 대통령과 청와대의 쇄신을 주장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맞선 2015년엔 유승민 대표에게 힘을 싣는 보도를 했다. 종편 개국일 박근혜 후보에게 “박 전 대표를 보면 빛이 난다, 이런 말을 제가 많이 들었거든요. 지금 형광등 100개쯤 켜신 것 같습니다”라고 질문을 던졌던 《조선일보》 박은주 기자는 불과 개국 4년 후인 2015년엔 <‘돌아온 것은 공허함만 남았다’ 대통령의 국어 실력>이란 제목의 칼럼에서 대통령 국무회의 발언에 나온 비문들을 빨간 펜으로 첨삭했다(박은주 기자, ‘< 돌아온 것은 공허함만 남았다’ 대통령의 국어 실력>,《조선일보》 2015년 6월 26일자) 당시엔 그게 어떤 비전문가의 첨삭의 흔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리고 2016년 20대 총선 결과, 국회에서의 여당 패권이 뒤집혔다. 민주당이 123석으로 1당이 됐고, 새누리당이 122석, 국민의당이 38석, 그리고 정의당이 6석을 차지했다. 사정기관, 철저하게 엎드린 여당, 그리고 30% 콘크리트 지지층만 보고 통치하던 정부에 대해 민심은 ‘여론조사에 잡히지 않던’ 심판을 내렸다. 이후 언론들은 다른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한윤형 데이터앤리서치 부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