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2016년, 네 번째 대규모 광장 촛불이 끌어내린 보수정부 (1)
촛불시위는 그렇게 특이하거나 희소한 형태의 시위는 아니다. 세계 역사나 한국 현대사에서도 그러한 형태의 시위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시위 주제도, 양상도, 규모도 제각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촛불시위를 다소 협소하게 규정하려고 한다. 21세기가 개막되던 시기의 한국 시민에서 지금의 한국 시민까지의 변동을 기술하려면, 몇몇 시위를 떼어내어 계열화하는 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촛불시위는 2002년 촛불시위를 시초로 하고, 2004년, 2008년, 그리고 2016년에 이루어진 시위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수십만 이상의 대규모 군중이 나와서 광장을 중심으로 촛불을 들고 나선 대중 시위라고 정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변화하고 있지만, 변화를 경험하는 자신조차 그 변화 이전의 자신의 모습은 잊기 쉽다. 오히려 그 변화의 한복판에 있었던 이들이 더 그러하다. 시간을 돌려 21세기가 시작됐던 2001년으로 돌아가 보자. 그 당시에 2002년, 2004년, 2008년, 그리고 2016년과 같은 촛불시위를 상상할 수 있었을까. 당시에도 시위는 있었다. 2001년, 일군의 학생운동권들은 대우자동차 부평 공장 해고노동자들의 공장 점거 해고 반대시위의 지원을 나갔다.
그때만 해도 시위의 주체는 노동조합 아니면 학생운동권이었다. 학생운동권들은 “김영삼 때만 해도 시위를 하고 있으면 상인들이 음식과 물을 날라다 주곤 했다”라고 회고한다. 말하자면 당시 정치적 이슈로 시위에 나서는 것은 학생운동권을 위시한 운동 세력이었고, 시민들은 그들에게 암묵적으로 동조할 경우 보조적인 역할 정도를 할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이전에도 운동 세력만이 시위에 나섰던 것은 아니었다. 시민들이 나선 항쟁의 순간이 있었다. 부마항쟁의 주동자로 오인받아온 주대환의 경우 ‘민주화 운동’과 ‘항쟁’ 두 가지를 엄밀하게 분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 지식인과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은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움직임으로 계속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민주화 운동에 처자식 있고, 먹고살기 바쁜 보통 사람들은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감옥 한 번 갔다오면 직장에서 해고될 텐데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거지요. 그래서 마음으로만 지지를 하고 응원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결정적인 시기에 정권을 무너뜨린 것은 지식인과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 아닙니다. 평소에 가만히 참고 참으면서 억눌려 있던 보통 시민들, 당시에 우리가 즐겨 쓰던 표현으로는 ‘민중’의 봉기입니다. ‘봉기’라고 하면 들고 일어나는 것을 말하지요. 민중이 봉기를 하면 몽둥이로 경찰서나 파출소 창문을 박살낸다든지, 기름을 끼얹어서 불을 질러버리니 ‘폭동’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억압과 폭력에 항의를 하여 맞서 싸운다는 의미로 ‘항쟁’이라고도 하고요.
이런 상황이 되면 지식인과 학생들이 상황을 이끌지 못합니다. 오히려 놀라서 말리거나, 구경꾼이 됩니다. 그래서 민중항쟁을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민중항쟁은 지식인과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부마항쟁이나 광주항쟁 같은 민중 항쟁을 지식인과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과 비슷한 그 무엇으로 인식하고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역사를 쓰는 지식인들의 아전인수(我田引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부마항쟁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는 항상 정직하게 부마항쟁은 그 이전의 학생운동,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에서 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당시에 부산이나 마산에서 학생시위가 도화선이 되기는 했지만, 그 자체가 시민 봉기는 아니었고, 따라서 학생시위를 주동한 사람들을 부마항쟁의 주역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부마항쟁 당시 1979년 10월 18일 밤, 마산 시민들의 구호는 “불꺼라!”였습니다. 중앙정보부 요원이나 경찰이 나의 얼굴을 알아보거나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심지어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 서로에 대해서도 누군지를 알아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만큼 유신 체제의 감시와 탄압은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미처 알아듣지 못하고 불을 끄지 않은 시내버스나 택시의 헤드라이트를 이단옆차기로 깨버리거나, 불을 끄지 않은 상가와 주택에 돌을 던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1979년 10월 18일 밤, 마산의 거리는 칠흑같이 어두웠습니다. 부마항쟁의 사진이 한 장도 없습니다.
그래서 언론에서는 흔히 이듬해 ‘서울의 봄’ 당시 학생들의 시위 모습을 부마항쟁의 사진으로 대용합니다. 바로 역사의 왜곡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하튼 그 어둠 속에서 군중은 비로소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이 되어 파출소에 불을 질렀던 것입니다. 평소에 파출소에 자주 끌려 들어가서 경찰에게 두들겨 맞았던 깡패, 구두닦이, 자동차 정비 공장이나 인쇄소 견습공, 건설 현장의 막노동꾼, 중국집에서 배달하는 소년, 술집에서 웨이터하는 청년들이 앞장섰습니다. 민주화 운동을 몇 년째하고 있었지만, 그 현장에서 저는 다만 구경꾼에 불과하였습니다.
제가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언론은 해마다 10월이 오면 저를 부마항쟁의 주역이라고 말하고, 대학교수들의 논문에서는 부마항쟁의 구호는 ‘독재 타도, 민주 회복’이라고 씁니다. 대학교수들은 그 현장에 있지 않았거나, 심지어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라도 그렇게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민중 사관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진정한 민중 사관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저를 부마항쟁의 주역으로 만드는 왜곡은 당시에 경찰과 보안대, 중앙정보부의 합동수사본부에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부산에서 1000명, 마산에서 500명을 잡아들였지만, 모두 순진한 시민들이었습니다. 부마항쟁을 ‘남민전(南民戰,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라는 친북 지하조직의 음모와 지령에 의해 일어난 사건으로 만들기 위해서 저와 제 친구들 몇 사람을 강도 높게 수사하였습니다. (...) (주대환,《 시민을 위한 한국 현대사》, 나무나무, 2017, 218~221쪽)
정리하자면 어느 시점까지 시위에 나오는 것은 위험부담이 큰 행위였다. 그렇기에 평시에는 조직이 있고 이념적 정체성이 있는 단위들이 거리에 나올 수 있었다. 이들을 운동 세력이라 불렀다. 대중은 평시에는 시위에 동의하면 이들을 지원하고, 관심이 없으면 내버려두는 식으로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다가 불만이 쌓이고 다른 사람들도 나올 수 있는 분위기라 위험부담이 줄어들 수 있다 싶으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항쟁을 주도하는 패턴이었다. 이럴 때는 더 이상 운동 세력이 주도할 수 없었고, 대중의 수가 얼마나 모였고 당국이 어떻게 진압하느냐에 따라 양상이 바뀌었다.
물론 너무 단순한 도식화는 경계해야 한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시위 분위기나 양상은 유신 시절이나 5공 시절보다는 오히려 지금과 흡사했다는 회고도 있다. 그렇다면 유신 이후 군부독재의 강화된 억압 때문에 왜곡되었던 시위 패턴이 정상화되는 단계라고 서술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데엔 시간이 조금 걸렸다.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학생운동권은 대규모 시위를 벌일 수 있게 되었다. 80년대 초반 학번들이 점조직 서클활동을 했다고 말한다면, 80년대 후반 학번들은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들고 나가 최루탄을 쏘는 전경에 맞선 것을 자랑한다. 아마도 1990년대 초반에 많이 발생한 학생운동권의 대규모 시위는 96년 연대 사태 때 정점을 찍고 쇠락하게 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와 같은 대립 속에선 아직 상인들은 음식과 물을 몰래 주는 정도 밖에 할 수 없었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전경은 최루탄을 쓰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학생운동권은 그 후 몇 년은 더 화염병을 사용했다. 최루탄은 없는데 화염병은 날아다니는 풍경이 지나쳤다. 이십 년 넘게 적대적 군비경쟁을 지속했던 양측이 상호 군축을 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그 상호 군축의 과정에서 결정적 한순간, 무기를 줄이는 양측사이에서 대중이 거리를 점거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만든 사건이 바로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이었다. 물론 체제가 아무 준비 없이 퇴거한 건 아니었다. 직전에 거리에서의 시위와 소요를 우려하여 시끄럽게 굴 만한 사람들을 미리 잡아 가둔 ‘월드컵 공안’ 정국이 있었다(당시 운동 세력은 이상하게 2002년 월드컵 직전의 그 시기에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였다며 그 시기를‘ 월드컵 공안’이라 불렀다. 이 시기의 학생운동과 ‘월드컵 공안’ 정국을 소재로 다룬 소설로는 2000년에 대학에 입학한 손아람 작가의《디 마이너스》(자음과 모음, 2014)가 있다).
하지만 뛰쳐나오기 시작한 사람들은 더 이상 당국의 예상 안에 있지 않았다. 길거리 응원에 참여한 이들의 숫자는 기록적이었고, 축제 문화가 없는 한국에서 젊은이들은 마음껏 열정을 발산했다. 이미 그해 초에 솔트레이크 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쇼트트랙 선수 김동성이 금메달을 뺏기는 것을 본 대중은 조별 예선 미국전을 앞두고 반미감정을 드러냈고, 그에 고무된 한총련은 미국전이 열리는 대구월드컵경기장을 포위하는 시위를 잠깐 기획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결국 그런 시위는 없었지만, 미국전에서 극적인 동점골을 넣은 안정환은 이천수 등의 동료들과 함께 김동성을 실격시킨 안톤 오노 선수의 헐리웃 액션을 흉내 내는 ‘오노 세레모니’로 대중을 열광시켰다. 이 세레모니는 훗날인 2008년 미국 CNN 방송이 선정한 인상 깊은 골 세레모니 6위에 링크된다.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이 일어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당시엔 단신 기사로 묻혔지만, 11월이 되어서야 이슈가 되었고 한 누리꾼이 《오마이뉴스》에 올린 제안을 계기로 11월 말부터 광장을 수놓은 촛불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 규모는 상당히 커져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압박감을 느끼고 시위에 참여하겠다고 와서 뒤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가게 될 정도가 되었다. 오히려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어차피 그 군중은 자신을 지지할 거라 여겼는지 시위 자제를 당부하기도 했다.
이는 몇 가지 부분을 생각해보면 아주 자랑스러운 기원은 아니다. 10장에서 본 박가분의 회고에서 드러나듯, 당시 운동 세력은 희생자들의 처참한 사진을 여기저기 게시했다. 진중권은 이에 대해 운동 세력에게 거세게 항의하여 인터넷에서 논쟁이 벌어졌는데, 다들 상황 자체의 잘못을 인지하기보단 진중권이 그 사진의 참혹함을 묘사한 방식에서 잘못을 발견하려 들었다. 냉정하게 전후맥락을 따져보면 사고였고 과실치사일 수밖에 없었는데, 미군들이 의도를 가지고 여중생들을 죽인 것인 양 서술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 글들 중 일부는 《오마이뉴스》 같은 매체에서 걸러지지 않고 게재되었다. 다만 당시에도 많은 이들이 이러한 경향에 대한 우려를 밝히기는 했다. 또한 어쨌든 이러한 기원을 밝혀야 왜 우리가 그 후 걸핏하면 촛불을 들게 되었는지가 해명된다.
그때 촛불이 선택된 이유는 ‘망자에 대한 추모’의 의미였다. 그러나 일단 이렇게 시작되자 이후엔 사람이 죽지 않은 이슈에서도 촛불을 들게 되었다.
<데이터앤리서치 한윤형 부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