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서울 광화문 등지 광고 전광판에 축하 사진과 영상이 붙자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아이돌 팬덤 문화에서 흔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는 ‘사생팬’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꼭 자유한국당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팬덤정치의 폐해’를 경계하는 이들이 있었다.
먼저 가치평가를 한다면, 2018년의 대한민국에서 ‘팬덤정치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정치평론의 입장에선 지나치게 안이한 자세다. 한국 정치에 팬덤문화가 들어온 것은 2000년 총선 노무현 후보의 낙선 직후였다. 이른바 ‘노사모’가 결성됐다. 그 흐름이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과 그해의 대선 승리를 이뤄냈으니 주류 정치에 그 파도가 몰아친 이후 세월만 16년이다.
그동안 이 흐름은 한국의 주류 정당정치의 내부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영향을 미쳤다. 모든 일이 그렇듯 그 영향은 긍·부정 여부를 잘라 말할 수 없는 복합적인 것이었다. 정당정치를 약화시킬 거란 우려도 있었지만, 실제론 오히려 그들을 통해 정당 지지층이 강화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현임 대통령의 탄생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단순한 규범적 재단과는 다른 방식으로 분석해야 할 사태다.
하지만 미국 뉴욕의 전광판 상영 광고, 이에 대한 반발로 ‘일베’ 회원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희화화한 영상을 상영한 사건, 대통령 광고 모금에 대한 횡령 논란 등까지 묶어서 본다면 지지자들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열성 지지층의 모든 행동이 그 정치인에게 도움이 되느냐는 문제다. 공교롭게도 생일광고를 준비할 때에 비해 생일주간은 대통령 지지율이 다소 스산해지는 시점이었다.
-‘1인1표’는 ‘1원1표’와 어떻게 다른가
문재인 대통령은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인이다. 민주주의 정치는 이른바 ‘1인1표’의 원리로 움직인다. 그에 비하면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이른바 ‘1원1표’의 원리로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이러한 요약은 2005년 출간된 장하준, 정승일의 <쾌도난마 한국경제>에서 가져왔다).
작동원리가 다르기 때문에 여러 차이가 생긴다. 가령 아이돌 팬덤에게 중요한 것은 전체 국민 중 그 아이돌에 대한 선호도는 아니다. 구매자 숫자가 중요하다. 더 정확히는 구매자 숫자도 아닌 구매력 그 자체다. 앨범을 열 장 구매하는 팬 한 명은 한 장 구매하는 팬 한 명보다 열 배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고, 공짜로 음악을 듣는 수십 명보다 훨씬 중요하다(고려할 지점이 몇 가지 더 있겠지만 일단 기본적으론 그렇다).
‘안티’들은 악플로 아이돌의 기분을 어지럽힐 수 있겠지만 그들 퍼포먼스의 질적 가치를 침해하지는 못한다. 이를테면 방탄소년단의 팬덤인 ‘아미’는 상당히 극성이고 소소한 소란을 만들어내는 걸로 알려져 있지만 그들의 행동은 방탄소년단의 음악적 성취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정치인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굿즈 구매자’와 마지못해 찍은 이의 가치가 적어도 대선 투표 당일엔 동일하다. 국정 수행 중 지지도 그렇다. 누군가의 열성이 다른 이들의 반감을 조금이라도 산다면 손해가 되며, 그 열성이 가져온 이득과 대차대조를 따져야 할 일이 된다. 그리고 정치인에겐 지지율과 성취가 무관하기는커녕 가장 밀접하게 연동된다. 지지층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정치인은 아무런 성과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차이를 직접 경험하면서 산 전직 정치인을 한 명 안다. 바로 유시민 작가다. 2천년대 초반, 팬덤 바깥 이들이 그 팬덤을 다만 ‘노빠’라 부르지 않고 ‘노유빠’라고 칭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인터넷 게시판에서 ‘노무현빠’와 ‘유시민빠’는 잘 구별되지 않았기에 쓰였던 말일 것이다.
이 말은 참여정부 말기 어느 순간 실종되었고, 이후 2012년 총선·대선 정국에서 잠깐 ‘노문빠’란 말로 부활했다. ‘노유빠’란 말을 기억하는 입장에선 흥미로웠다. 이후엔 문재인 대통령이 완전히 그 진영의 대표로 자리매김했기에 ‘노문빠’란 말도 차츰 사라졌고 다만 ‘문빠’라는 말이 남았다.
현재 대중교양 도서 작가로서 유시민의 위치는 정점에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정도는 아니었지만 정치권에 뛰어들기 직전 유 작가의 유명세도 상당했다. 2010년 국민참여당을 창당하기 직전엔 지금에 버금갔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의 유시민은 그리 공고한 존재가 아니었다. ‘노유빠’란 말로 대변된 열성 지지층은 그리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 일각에서도 그를 비토했기 때문이다.
흔히 ‘호남 향우회’라고도 표현되는 기존 민주당 조직은 그를 위해 움직이기를 거부했다.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을 유시민의 기획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일부는 심지어 유시민이 김대중을 반대하고 ‘제3후보 조순’을 주장했던 1997년의 기억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원한의 정당성 여부와는 별개로 그것은 정치인 유시민에게 질곡이었다. 2010년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그는 국민참여당 후보로 나와 민주당과의 단일화까지 성사시켰지만 김문수에게 패배했다. 유시민을 찍은 표는 경기도 전역에서 민주당을 찍은 표만큼도 나오지 않았다.
이처럼 정치에선 ‘안티’가 적은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보통 열성적인 팬덤은 이런 사례를 말해도 사태의 다른 면에 주목한다. 이를테면 “그러니까 사방이 적들로 가득 찬 문재인 대통령을 우리가 열성적으로 지켜내지 않으면 저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라는 식으로 말한다.
-열혈 지지층의 판단이 사실과 다른 부분은?
이러한 인식 역시 극단적이다. 열혈 지지층은 정서적 고양을 유지하기 위해 상황을 과장한다. 현재 문재인 대통령이 처한 국면은 유시민 작가는 물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참여정부 사례와도 전혀 다르다. 재임 당시의 노무현에 비해 문재인의 여당 내 입지는 확고하다.
담론 환경도 참여정부 때보다 훨씬 좋다. 열혈 지지층이 ‘기득권세력인 적들’과 ‘내부총질하는 아군 내 적들’에 대한 증오를 유지하기 위해 보수언론이든 진보언론이든 모두 ‘안철수 언론’으로 부르는 상황과는 별개로 말이다.
오히려 그들이 거듭 그런 식으로 집단적 증오를 유지하고 있는 그 모습이 사람들에게 생경하고 낯설게 보이는 경우가 더 많다. 또한 올림픽 단일팀에 대한 최근의 비판 여론에서 보여주듯, 정말로 사람들이 싫어하는 방향으로 정부가 움직이면 담론을 정화하겠다는 적극적 댓글 활동 따위는 무의미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열혈 지지층은 상황은 극단적으로 가정하면서도 본인들이 다수파라 낙관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그들은 본인들이 19대 대선에서 문 대통령을 지지한 41.1%를 넘어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 최대치였던 80% 이상의 국민을 대변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그런 이들이 국민의 80%가 넘는다면 그들의 활동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당연하게도 진실은 그 방향이 아니다. 오히려 문재인 대통령에게 기표한 41.1% 중에서도 그들은 소수파일 것이다(정확한 숫자를 추산하는 것은 다소 어려울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행동력이 강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소 편하게 말을 하는 온라인에서조차 그들의 활동이 극렬하면 사람들은 침묵을 선택한다.
이 ‘침묵’은 다만 동조를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일부는 동조자들이다. 기득권에 대한 적개심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부채를 공유하면서, 비록 행동은 함께 하지 않더라도 그런 행동이 필요하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막연한 반감을 가지게 되는 이들이 있다. 이들로 말할 것 같으면 대통령과 열혈 지지층을 분리해서 생각해주면 고마운 정도다. 열혈 지지층의 행동 때문에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은 아니나, 정부의 지지율이 하강하고 다소 위기에 처했을 때에 그들이 정부의 버팀목이 될지 아니면 짐이 될지를 물어본다면 별로 긍정적인 답을 주기 어렵다. 과한 행동이 누적될수록 침묵의 패턴이 전자에서 후자로 이동하는 비율도 늘어난다.
문재인 정부는 의회 구성과 국회선진화법으로 인해, 그리고 추진하겠다는 개혁의 장대함으로 인해 다른 정부에 비해서도 더 높은 국민 지지율이 필요하다. 지금은 지방선거까지는 별 문제없어 보였던 지지율이 의외의 이슈들을 암초처럼 맞아 다소 하강한 모양새다.
일부 열혈 지지층은 이 상황조차도 자신들에게 동조하지 않은 다른 지지자들(그들이 ‘비판적 지지자’라 부르는)의 문제라고 한다. 하지만 팬덤이 존재한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모든 유권자들이 팬덤에 동조하기는 어렵다. 정부든 지지층이든 개혁을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기본에서부터 다시 생각해볼 시점이 아닐 수 없다.
*선을 넘는 행위(Over the line)는 스포츠 경기에선 반칙입니다. 하지만 사회문제를 제대로 들여다보려면 기존의 구획, 영역, 선을 넘어서서 생각해보는 시선을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정치/시사/언론/문화 등의 영역을 가리지 않고 선을 넘어서서 다룹니다.
데이터앤리서치 한윤형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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